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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본의 본초사

(제3절 일본의 본초사) 주로 한반도의 도래인을 통해 의학이 지식 전래되었다. 전국시대(15세기 중반 ~ 16세기 후반)에 전쟁 을 거쳐 축적된 본초와 의학 지식은 교류되거나 정리되지 않고 쇼군에게 속한 가신의 지식에 머물렀다. 17-18세기에 이르러 개인에 의해 본초서 출간되었으나 체계가 미비한 개인 저작의 한계를 뚜렷하게 가지고 있으며 일종의 박물학적인 지식에 머물렀다. 또한,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양지식과 결합되어 오히려 박물학적 성격이 오히려 심화되기도 하였다.

 

○ 5~6세기에 불교의 전파와 함께 전해짐. 대부분 한반도를 경유하여 유입.

▷ 《本草和名》 深根輔仁 (10세기초)

→ 일본의 최초 본초서

→ 약명을 일본어로 번역한 사전적 성격을 띰.

▷ 본초는 박물학의 일부분으로 존재함.

 

○ 전국시대(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)를 거치며 전쟁 수행의 일환으로 의관을 두었으나 축적한 본초 지식은 막부 내에 머물렀고, 국가가 주도한 본초서를 발간하지는 못하였음.

→  본초 전문서라기 보다는 임상의 참고서적 성격을 지님.

 

○ 전문 본초서는 주로 개인에 의해 저술되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하였음.

▷  《大和本草》 貝原益軒(1709)

▷  《一本堂藥選》 香川修庵 (1729~1734)

▷  《藥籠本草》 香月牛山 (1734)

▷ 《本草補萓》 松岡恕軒(1668-1746)

▷ 《藥徵》 吉益東洞 (1784)

→ 예. 18세기의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當歸와 芎藭1의 효능을 명확히 구분 못하는 등 그 한계가 뚜렷함.

▷ 《本草綱目啓蒙》 小野蘭山(1803)

▷ 《藥治通義》 丹波元堅 (1755-1810)

▷ 《本草圖譜》 岩崎灌園(1828)

▷ 《本草通串》 前田利昇(1800 ~ 1859)

▷  《和漢藥考》 小泉榮次郞 (1893)

 

○ 메이지유신(1868~1889)을 거치며 서양의 의학지식과 결합하여 박물학적 경향이 심화되었음.

○ 그로 인해 현재에 이르러서는 古方 위주의 한방의학이 남게 되었음.

 

일본 본초사의 흐름

: 주로 한반도의 도래인을 통해 의학이 지식 전래 →  전국시대(15세기 중반 ~ 16세기 후반)에 전쟁을 거쳐 축적된 본초와 의학 지식은 교류되거나 정리되지 않고 쇼군에게 속한 가신의 지식에 머무름 (즉, 의학지식의 사유화와 권력수단화) →  17-18세기에 이르러 개인에 의해 본초서 출간되었으나 체계가 미비한 개인 저작의 한계를 뚜렷하게 가지고 있으며 일종의 박물학적인 지식에 머무르게 됨 →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양지식과 결합되어 오히려 박물학적 성격이 오히려 심화됨 → 古方 위주의 의학이 남게 되었음.

 


제2장 본초학의 역사 – 바로가기

우리나라의 본초사 1 (上古~高麗)
우리나라의 본초사 2 (朝鮮~近代)
중국의 본초사 1 (先秦~南北朝)
중국의 본초사 2 (隋唐~宋)
중국의 본초사 3 (金元明淸)
일본의 본초사


  이상은 아래의 교재 해당 부분을 편집자의 의도에 맞추어 요약 기술하고, 학술적 견해를 추가한 것입니다. 본초학총론 강의자료의 오류 교정 및 수정, 보충 사항을 지속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기에 게시합니다.

1: 전국한의과대학본초학공동교재편찬위원회. 本草學. 서울:영림사. 2016:22-72.
2: 주영승. 증보운곡본초학. 전주:도서출판우석. 2013:8-76.





각주

  1. 當歸 芎藭. 仲景之方中 用當歸 芎藭者 其所主治 不可的知也. 今不敢鑿從成方而用焉 是闕如之義也. [辨誤] 本草以當歸芎藭治血 為產後要藥. 為則按: 仲景氏治血方中 無此二藥者多. 而治他證之方中 亦有此二藥. 如奔豚湯 當歸羊肉湯 酸棗仁湯類是也. 由是觀之 不可概為治血之藥也. [品考] 當歸 江州伊歕山所產 其味辛, 同漢土所產而和州所產 味甘 此以糞土培養之者也 不可用矣. 孫思邈曰 無當歸 以芎藭代之. 今試嘗和州當歸 其味大不似芎藭也. 伊歕當歸則似焉 故用之也. 芎藭 出本邦豐後州者 上品也.